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레올로고스 왕조 (문단 편집) === [[안드로니코스 3세]](1328~1341) === 7년간의 내전을 치른 끝에 단독 황제가 된 [[안드로니코스 3세]]는 [[요안니스 6세|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]]의 보좌를 받으며 제국을 나름 잘 다스렸다. 그는 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매관매직을 엄격하게 단속하고, 고위 공직자의 탈세를 엄중히 감시했다. 특히 1337년엔 부정부패 단속을 맡은 '보편 법관' 네 명 가운데 세 명을 뇌물을 받은 혐의을 적용해 직위를 박탈하고 유배보냈다. 또한 황제는 외세에게 공물을 납부하며 고분고분하게 대하던 안드로니코스 2세 시절에서 탈피해 강경책을 꺼내들었다. 불가리아 차르 [[미하일 아센 3세]]가 트라키아를 침략하자,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보복에 나서 불가리아의 요새 한 곳을 점령했다. 이후 양측은 무력 충돌을 벌이다가 강화 조약을 맺고 향후 2년간 상호간 침략 행위를 금지하기로 했다. 1330년 7월 28일 불가리아군이 [[벨버즈드 전투]]에서 [[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]]가 이끄는 세르비아군에게 궤멸되고 차르 본인도 전사하자, 안드로니코스 3세는 누이의 명예를 되찾는다는 구실로 불가르족에게 넘겨줬던 메셈브리아와 앙키알루스 등 흑해의 항구들과 국경 주변의 요새 몇 군데를 점령했다. 그러나 1331년 세르비아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살해하고 집권한 [[스테판 두샨]]이 제국을 침략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. 그는 마침 자신처럼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불가리아의 차르 [[이반 알렉산더르]]와 결혼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동로마 제국을 침략했다. 이반 알렉산더르는 빼앗긴 흑해의 항구들을 손쉽게 되찾았고, 스테판 두샨은 남쪽의 제국 영토로 꾸준히 밀고 내려갔다. 설상가상으로, [[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]]가 1334년에 제국을 배신하고 세르비아 진영으로 넘어갔다. 스테판 두샨은 시르얀니스를 따뜻하게 맞이해주고 그에게 군대 지휘권을 줬다. 이에 시르얀니스는 1334년 봄에 카스토리아와 그 일대의 요새 여러 곳을 점령해 은혜에 보답했다.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스프란체스 팔레올로고스를 테살로니카 일대의 총독으로 임명해 시르얀니스를 유인한 후 생포하게 했다. 스프란체스는 임무를 완수했지만, 생포하지 않고 현장에서 죽여버렸기에 견책 처분을 받았다가 곧 대 스트라토페다르크의 서열로 승진되었다.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는 스테판 두샨과 협상한 끝에 세르비아와 헝가리와의 싸움을 제국이 지원해주는 대가로 시르얀니스가 점령했던 영토를 제국이 반환받는 협약에 서명했다.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는 [[이피로스 전제군주국]]과 테살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하게 다졌고, 제노바를 상대로 해전을 벌여 뚜렷한 성과를 거두는 등 제국의 위신을 세웠다. 그러나 1341년 6월 열병에 걸려 사망한 후, 제국은 또 다시 내란에 휩쓸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